2022. 11. 8. 14:39ㆍ달리는 나의 하루
첫 하프 마라톤 대회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인생의 첫 마라톤을 미국에서 하게 되었네요. 마라톤을 하게 될지 너도 모르고 나도 몰랐지요. 아무튼 걷고 뛰면서 달려온 80여 일의 기억들이 스쳐가네요.
첫 도전의 목표였던 13.1 마일 완주는 하였기 때문에 우선은 감사하고 후련한 마음이 듭니다.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자고 했지만 근육통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니까 사람인지라 아쉬움이 아주 많이 밀려오네요. 연습 때 보다도 못한 기록을 남겼거든요. 후회까지는 아니고 나의 부족했던 점을 보완해서 다음번에 잘하고픈 마음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남겨봅니다. 그렇다면 저의 첫 하프 여정에서 제일 큰 문제는 무엇이었는고 하니,
5마일 지점에서 찾아온 무릎통증이었습니다.
그동안 달리기 연습을 하고 나면 항상 오른쪽 무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다리에만 무릎 보호대를 하고 나갔지요. 출발도 좋았고 날씨도 좋아서 5마일까지는 가볍게 잘 달리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오른쪽 무릎을 보호한다고 왼쪽 무릎에 무게를 실었나 봅니다. 갑자기 왼쪽 무릎을 굽힐 때마다 악 소리 나게 아픈 것 아니겠어요. 그 와중에 또 언덕코스가 나타나서 무릎이 너무 아팠습니다. 속도는 늦더라도 적어도 10마일까지는 쉬지 않고 한 번에 달리고 싶었는데 6마일 지점을 눈앞에 두고 걷게 됩니다. 러너스 하이를 느껴보고 싶었는데, 5마일이면 이제 몸이 풀리면서 가벼워질 순간인데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멈추는 것이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걸을 때는 그 정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달리면서 발을 땅에 내딛을 때 힘이 무릎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7마일까지는 땀을 식히면서 그냥 걸었습니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어서 슬픈 마음으로 걸었지요. 물도 마시고 챙겨 온 에너지 젤도 먹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2시간 25분 그룹에 서서 출발했는데 이때 그들을 앞으로 보내야 했죠. 7마일도 못 가서 걷게 되는 것은 연습에도 없었고 상상 속에서도 없었기 때문에 멘탈이 좀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7마일을 넘기고는 다리가 좀 나아지는 것 같아서 8-9마일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천천히 뛰던 나의 속도와 비슷했던 기억이 나서 걷더라도 속도는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10마일 지점부터 다시 뛰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내 몸은 내 맘도 몰라주고 뛰면 무릎 통증이 오고 걸으면 낫고 해서 밀땅을 하듯 걷고 뛰고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즈음 2시간 30분 그룹도 앞으로 보내게 됩니다. 흐르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맘이었지요. 그래도 포기는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계속 걷고 뛰고를 반복했습니다. 멈추지 않고 뛰어가는 사람들은 저만치 멀리 가니 누가 누군지 모르다가 걷다가 뛰다가를 하다 보니 옆에 사람들이 내 앞에 있었다가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나오다 보니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말 7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주 느린 속도지만 멈추지는 않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구를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싸움과 도전과 성취. 정말이지 저것이 마라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느린 속도로 무릎에 힘을 조절하면서 달렸고 피니쉬 라인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봐도 놀라운 코스.
저 호수는 차 타고 지나면서도 정말 크고 탁 트였다고 생각했는데 저 큰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고 엄청 뿌듯합니다. 다시 가보게 된다면 구간구간마다 느꼈던 생생한 감정이 올라올 거 같네요. 풍경도 너무 예뻐서 언젠가 한 번은 더 달려보고 싶은 코스예요. 몸은 힘들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장면마다 아름다워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진은 없음🥲
그리하여 나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애플 와치가 정확하지 않아서 나이키와 스트라바 앱을 켜고 했는데 거의 정확한 것 같아요. 나이키는 킬로미터로 설정했는데 초반은 킬로당 6분대로 잘 뛰었는데 결국 8분대의 기록이 나왔어요. 그래도 걷고 뛰고 한 구간이 반이었던 걸 감안하면 생각보다 (처참하게) 늦어지진 않은 것 같아요.
대회기록으로는 마일당은 딱 13분이고 2시간 50분에 들어왔네요. 아이들이 엄마 꼴등 했냐고 물었는데 뒤에 33명이나(?) 더 있었다고 했지요. 하프 마라톤 후기 글 어디를 봐도 이런 기록은 못 본것 같아서..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부끄럽지도 않아요. 참가자가 원래는 훨씬 더 많았고 중도 포기한 사람들도 꽤 있었기에 이만하면 안전하게 잘 마무리했다고 위로해봅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다음 마라톤을 알아보고 있죠. 당연한 수순인 거 같습니다. 일단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다음은 분명 오늘보다 나아질 것을 아니까요. 왜 사람들이 달리기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지 알것 같아요.
암튼 저의 약점인 기본 체력을 좀 더 키우고 특히 다리에 힘을 길러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아요. 대회에 나가서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달리기를 꾸준히 하고 정말로 "달리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고요. 얼떨결에 하프마라톤을 준비한 세 달의 시간 동안 분명히 행복했습니다. 이 기분을 앞으로 쭉 이어가고 싶어요. (하프지만) 마라톤 완주도 했는데 다른 거 무엇이 겁나겠나 하는 깡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무릎 찜질 잘해주고 관리해서 쭉쭉 달려 나가겠습니다. 처음에 계획한 2시간 25분 그룹으로 (그 이상으로) 걷지 않는 것을 목표로 내년 봄에 다시 한번 꼭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또 그 다음의 세상이 펼쳐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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